유래및연혁

미수동 유래 및 연혁

미수동은 「독오지리(禿吾之里)(1780년대)」 또는 「禿吾皮 (1860년대)」라 하였다. 이곳은 광바구 끝에서 보디섬가지의 해안선이 마치 활과 같이 생겼다하여 활과 활시위를 연결한 고자 맨 것이 닿는 곳인 도고지, 그리고 이곳에 붙여놓은 가죽을 도고피라고 하는바 이도고지와 도고피를 단순히 한자로 옮겨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900년의 행정 개편 때 「미오동(美吾洞)」이라 하였다. 민간인에게 구전되어 오기는 「독오지」에서 「미오지」로 불려져 오다가 「미우지」로 음이 변하여 지금까지 불리어지고, 1914년 미오동과 지금의 미수2동인 남수동(南修洞)을 합동(合洞)하여 미수리(美修里)라 불리어지게 되었다.

또한 세포고개(가는개고개)는 미수1동과 신앙읍을 경계짓는 고개인데, 옛날 미수1동 마으을 「미우지」라 하여 이곳을 「미우지고개」라 불렀다.

구 미수1동의 선금산(仙錦山) 중턱에는 큰 바위 두개가 있는데 아래 위로 붙어 마치 맷돌처럼 생겼다 하여 맷돌바구라 부른다.

골짜기로는 선금산 폭포 아래의 골짜기를 물뱅이골이라고 하며 또 이를 「빙암곡」(氷岩谷), 「어름박골」 이라고도 한다.

가지밭이 있었다하여 「까치박골」이라 불리는 골짜기가 있는데 이는 「어름박골」서쪽에 있다.

미우지 약천이라 하여 옛 미수1동 현금산 아래 미우지마을에 있는 우물인데 옛 문헌에는 「빙암약천」이라 한다.

연혁

  • 조선초기 : 고성현에 속함
  • 1677년 : 고성군 춘원면
  • 1900년 : 진남군 서면
  • 1909년 : 용남군 산양면
  • 1914년 통영군 산양면 미수리 미오동(미수1동)과 남수동(미수2동)을 합동하여 미수시라 칭함
  • 1955.09.01. : 통영읍이 충무시로 승격시 미수동으로 개칭
  • 1955.12.24. : 미수1동, 미수2동 분동
  • 1957.06.27. : 미수1동, 미수2동 합동
  • 1962.03.14 : 미수1동, 미수2동 분동
  • 2010.12.31. : 미수1동, 미수2동 합동
  • 2012.10.11. : 통합 신청사 개청

미수동 (옛)지명

  • 선금산 일명 현금산(懸金山)이라고도 하는데 구,미수1동의 마을 뒤편에 위치하여 우뚝솟은 연봉(連峰)들이 달리고 있는 형상이며 짙은 숲과 많은 바위들이 신령스럽게 느껴지는 산이다. 옛 문헌에는「현금산」이라 하였으나 일반적으로 이곳 마을 사람들은 「선금산 (仙金山)」이라 부르고 있다. 또한 예부터 영험이 있는 산이라 하여 무당들의 무속이 성행했던 곳으로 아직도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한편으로는 매미같이 생겼다 하여「선금산(蟬琴山)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산 중턱에 있는 작은 폭포는 겨울철에도 따뜻한 우리 고장에서는 보기 드물게 얼어서 빙암(氷岩)이 된다 하여 이를 「빙암산(氷岩山)」또는 「빙암폭포」라 부른다.
  • 노리맷등 구 미수2동 「작은삽쟁이골」의 남쪽 등(嶝)으로 산의 형국이 노루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지명
  • 미우지고개 구 미수1동과 구 산양면을 경계짓는 고개인데 옛날 미수1동 마을을 미우지(美吾之)」라 하여 이곳을 「미우지고개」라 불렀다. 옛날 당포진(唐浦鎭)의 수군만호(水軍萬戶)가 통제영을 출입할 때 점심을 먹던 곳이라 하여 고개 옆의 작은 등성이를 「점심치(點心峙) 또는 오반치(午飯峙),「점심고개」라 불려 왔다. 그 후 구 산양면의 가는개(細浦)마을의 이름을 따서「세포고개」또는「가는개고개」등으로 불리고 있다.
  • 숫돌고개 구 미수1동과 미수2동을 경계짓는 독산(獨山)의 기슭으로, 예부터 이곳에 숫돌이 많이 나는 곳이라 하여 「숫돌고개」라 불린다.
  • 맷돌바구 구 미수1동의 선금산 중턱에 있으며, 큰 바위 두 개가 아래 위로 붙어 마치 맷돌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탕건비구 구 미수1동「선금산」중턱에 있으며, 탕건(宕巾)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폰데다리 구 당동과 미수2동을 경계하며, 오늘날의 충무교(忠武橋)를 말한다. 옛날 이곳은 미륵도와 연결된 가늘고 작은 목으로, 그 후 배가 지나 다닐수 있게 파낸 곳이라하여「판데(목) 또는 폰데(목)」으로 불렸다. 옛 문헌에는 굴포(掘浦), 굴량(掘梁), 착포량(鑿浦梁), 착량(鑿梁)으로 기록되어 있다. 1757년(영조33) 이곳에 나무다리를 세우고「掘梁橋」라 하였으며, 그 후 여러 차례의 보수와 철거, 재건설 후 1915년 김삼주가 사재를 들여 이곳에 돌다리를 세우고「착량교(鑿梁橋)」라 하였다. 그 후 이 돌다리를 헐고 1932년 이곳에 「해저터널」을 준공하였으며, 1967년 이곳 바다 위로「충무교(忠武橋)」를 준공하여 오늘에 이른다.
  • 송장나리(送狀津) 당동의 서쪽해안 모서리로 구 미수1동의 보디섬과 마주 보고 있는 곳이다.
  • 안개(內浦) 구 미수1동의 서쪽 깊숙이 들어간 포구를 일컫는다.
  • 미우지약천(氷岩藥泉) 구 미수1동 미우지마을에 있는 우물인데, 옛 문헌에「빙암약천(氷岩藥泉)」이라 전하며, 현금산 아래에 있다고 하였다. 지금은 폐쇄되었으며 「약천(藥泉)」이라 쓴 표석만이 이곳 길가에 서 있다.
  • 보디섬(寶帶道) 구 미수2동에 있는 작은 섬으로 근래 일본인들이 이곳 일대에 집단 마을을 형성하기 전까지는 육지와 떨어진 독립된 섬이었다.
  • 중상골 구 미수1동과 2동의 중간 골짜기로 옛날 이 곳에서 중을 화장하여 뼈를 사르던 곳이라고도 한다.
  • 물뱅이골 구 미수1동의 선금산 폭포 아래의 골짜기를 말한다.
  • 숲골 구 미수2동의 파출소 위쪽으로, 옛날 숲이 우거진 골짜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삽쟁이골 독산(獨山) 옆의 구 미수1동 첫골짜기를「큰산쟁이골」이라 하며, 인접한 구 미수2동의 갈대밭 늪지대를 「작은삽쟁이」라고 일컫는다.
  • 어름박골 구 미수1동 선금산 폭포 아래의 골짜기로 「빙암곡(氷岩谷)」이라고도 한다.(참조: 선금산)
  • 까지박골 구 미수1동 「어름박골」의 서쪽에 있으먀, 이 곳 골짜기에 가지 밭이 있었다 하여 지금까지 「까지박골」이라 불린다.
  • 강바위골 작은자갈로 구성된 자연발생 해수욕장이다.
  • 신촌 구 미수2동사무소의 아래 바닷가에 새로운 동네가 형성되었다하여 「신촌(新村)」이라 하였으며 그 후 이곳 일대를 「남수동(南修洞)」이라고도 불렀다.
  • 미우지 구 미수1동 지역으로 옛 문헌에 이곳을 「독오지리(禿吾之里) (1780)」또는「독오피(禿吾皮)(1860년대)」라 하였다. 이는 이곳의 광바구 끝에서 보디섬까지의 해안선이 마치 활과 같이 생겼다하여 활과 활시위를 연결한 고자 맨것이 닿는 곳이 도고지, 그리고 이곳에 붙여놓은 가족을 도고피라 하는 바 이 도고지와 도고피를 단순히 한자로 옮겨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900년의 행정개편 때 「미오동(美吾洞)」이라 하였다. 「독오지」에서 「미오지」로 불려져 오다가 「미우지」로 음이 변하여 지금까지 불러오고 있다. 1914년 미오동과 구 미수2동인 남수동(南修洞)을 합동하여 「미수리(美修理)라 불러지게 되었다.

담당자
미수동 행정민원팀 (☎ 055-650-3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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