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및연혁
유래
한산면의 「한산」은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섬 이름인 「한산도(閑山島·한산섬)」에서 유래했다. 중세기의 한산도는 완만한 산야에 초지를 이루고 있어 나라에서 말을 기르는 목장으로 관리되었으며, 이를 「한산도목장」이라 칭했다.
이곳 주원방포(周原防浦, 현 추봉리 추원포)는 고려말 이래 왜구들의 극심한 노략질을 응징하기 위해 세종 1년(1418) 삼군도체찰사 이종무가 병선 227척과 병력 1만7천285명의 군사를 이끌고 대마도 정벌의 대장정에 오른 출전지가 되었다.
그리고 임진란 때에는 우리 수군이 이곳 앞 바다에서 왜적들을 일거에 괴멸시킨 청사에 빛나는 한산대첩을 이룬 것을 비롯하여, 최초의 조선 삼도수군통제영인 한산진이 설치되는 등 그야말로 민족자긍의역사와 구국혼이 서린 성역인 곳이다.
행정구획상으로 한산면 지역은 원래 거제에 속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거제군 3현 가운데 하나인 명진현(현 거제시 동부면 지역)에 관할되었으며, 그후 조선초기까지는 거제현 남면, 그리고 후기에는 거제현 둔덕면 7방에 속했으며, 행정동리는 창동(倉洞)·두억포(頭億浦)·고포(羔浦)·걸포(?浦)·여차포(汝次浦)·야소포(冶所浦)·서좌리(西佐里)·동좌리(東佐里)·죽도(竹島)·호두(虎頭)·추원(秋元)·용초(龍草)·봉암(峰巖)·비진(非珍)의 모두 14동(洞)이었다.
그후 한말 광무 4년(1900) 고성군에서 분리 독립된 이 고장 진남군에 편입되어 진남군 한산면으로 구획된 이래, 용남군 한산면 및 통영군 한산면, 그리고 통영시 한산면이 되었다. 「한산(閑山)」은 옛 거제현에 속한 거제도 서쪽에 인접한 수많은 섬 가운 데 가장 대표적으로 큰 섬이란 뜻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료된다. 즉 전래의 옛 지명가운데 「한밭」·「한강」·「한티(큰고개)」· 「한산」·「한실」 등의 예와 같이 「한」은 크다 (大) 또는 많다(多)의 뜻을 지닌 대표적인 우리말이었으며, 한·대 등의 한자로 음훈차표기하여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곳 「한산도(閑山島·閒山島·寒山島)」또한 여러 한자지명으로 표기 되었던 사례로 보아 큰 섬을 일컬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옛 토박이지명 「한섬」·「한뫼섬」에서 유래한 한자지명으로 분석된다.
종래의 「한산도」지명유래설 가운데 "통영 앞바다에 한가하게 떠 있는 섬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한(閑)」자를 「막는다(防)」의 뜻으로 풀이하여 "임진왜란 때 이충무공이 이곳에서 왜적을 막아 쳐부순 것에서 유래했다"는 등의 민간어원설이 있다.
그러나 호수같이 잔잔한 한려수도에 떠 있는 크고 작은 150여개의 섬들이 옛날 모두 한적하지 않았던 곳이 과연 어디 있었을까 싶으며, 조선초기의 문헌 <경상도속찬지리지(1469년)>에 이미 「한산도목장(閑山島牧場)」으로 지명이 전해지는 것으로 미루어 임진란설 또한 설득력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과 관련된 마을지명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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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포(더풀개)
임진왜란 때 한산 앞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 전법에 결딴났던 왜군의 패잔병들이 우왕좌왕 도망갈 길을 찾자 우리 수군들이 한산만으로 유인, 일부는 두억개에서, 일부는 이 개안에서 모조리 도륙하였다. 왜적들이 온 개안을 덮었다 하여 덮을 개라 했고, 100년 전쯤 인가가 들어서서 살아온 뜸이 있었으나 근년에 와서 제승당 성역화 사업으로 이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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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개(대고포)
임진왜란 때 이충무공이 군수용 소금을 구워 공급한 염전(鹽田)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염포(鹽浦)라 부르다가 그 후 고포(羔浦)로 이름을 고쳤는데, 1961년도에 대고 포, 소고 포로 분 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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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추리(여차)
제승당으로 들어가는 바닷길 좌측 고동산 밑에 있는 곳으로 여차 마을의 옛 지명은 '내추리'로서 배를 젓는 노(櫓)를 뇌 추리라 하였는데 삼도수군통제영의 각종 전선에 필요한 노를 이곳에서 제작·공급하였다. 즉 뇌 추리의 '뇌'는 '노'의 방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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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산
제승당으로 들어가는 바닷길의 좌측에 위치한 해발 188m의 산이다. 임진왜란 때 서로 연락을 취하기 위해 이 산에 올라 소라고동을 불어 신호하였다 하여 고동산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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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바위(장곡)
장곡마을 북편 도로변, 바다로 쑥 내민 언덕 왼쪽 오목 들어간 곳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뜸이다.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의 함선을 수리했던 곳이라 하기도 하고, 조선 수군에서 필요한 도 간(도가니, 질그릇)을 만들었다 해서 도 간 배우라 불리기도 하고, 마을 옆에 홀로 외롭게 서 있는 바위 즉 독암(獨岩)이 있었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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숯덩이골(장곡)
제승당에서 약 9㎞ 떨어진 장곡마을에 있는 곳으로 임진왜란 때 여러 군영에 필요한 숯과 기타 연료를 만들어 공급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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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동(倉洞)
제승당에서 동남쪽으로 약 9㎞ 지점의 해변에 있는 이 마을은 글 자 그대로 창고(倉庫) 마을이다. 임진왜란 당시 약 3,000석가량의 군량미를 비축했던 창고가 있었던 곳으로 창동(倉洞)이라 불리게 된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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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정포(立定浦)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영의 전선들이 왜적의 습격을 대비하고 적선을 발견하여 공격하기 위해 이 일대의 해역을 초계(哨戒- 적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 일정 지역에 병력을 배치하고 감시를 엄중히 하여 경계함) 하다가 이곳에 일시 입항하여 정박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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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두(津頭, 陳頭)
임진왜란 당시 우리 수군이 진을 치고 경비초소를 두어 통제영과의 연락 보급과 담당구역의 해상경비 임무를 수행하던 곳(陣頭)이며, 또한 예부터 한산본도와 추봉도 사이의 좁은 해협을 연결하는 나루 터(津頭)의 구실을 해 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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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소(冶所)
건양 원년(1896)에 마을 이름을 매동리라 고쳤는데, 후에 동네가 번성하지 못하여 그 연유를 알아본 결과 바다 바로 건너편에 벌바우 (봉암)마을이 마주 보고 있어 벌바우의 벌떼들이 매동리의 꿀을 거두어 가는데 어찌 흥할소냐 하여 옛 이름 그대로 야소로 고쳐 오늘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당시 풀무간(대장간)을 설치 쇠를 녹여 병장기를 제조하 고 수리하였던 곳으로 풀무란 뜻의 한자인 '冶'를 따서 '야소冶所' 라 일컫게 되었다. 오늘날의 병기창이 있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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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衣岩, 옷바우)
임진왜란 때 한산도에 주둔한 우리 수군들의 군복을 짓고 수선하는 피복창(被服廠)이 있었고,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거대한 바위들 이 널려 있으며, 어느 곳보다 햇볕이 강하고 일조 시간이 길므로 빨래한 군복들을 널어 말리기에 안성맞춤인지라 수만 벌의 각양각색의 군복이 이 해변과 산기슭 일대에 널려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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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개(荷浦, 하포)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이곳에다 보급창을 두고 각 진 영에 보급할 군수물자의 조달과 보관 및 보급에 관한 일을 보았다. 그래서 왜적과 싸우는 우리 수군의 병참 지원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각지에서 조달해 온 군수물자를 싣고 들어온 배들과 각 진영에 보급할 물자를 실어 나르는 배에서 짐을 어깨에 메고 싣고 풀었다 해서 멜개라 일컫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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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개
멜개(하포)마을을 중심으로 남북에 솟아있는 두 산을 잇는 잘록한 목너머에 위치한 곳으로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이 사용할 물을 공 급하기 위해 이곳에다 넓고 큰 못 여러 개를 만들어 놓고 군사용 식수 및 생활용수를 저장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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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터골
개목(의항)마을과 매왜치의 동그만 두 갑곶이 사이의 쑥 들어간 개 안(포구)이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의 본영이 여기 한산도에 설치되었을 때 육전대의 전투훈련을 벌였던 곳이다. 이 진터골은 상륙훈련은 물론, 진(陣)치는 법,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포위 섬 멸하는 전술을 익힌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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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왜치
매왜치란 왜적의 시체를 매장한 갑곶(치)이란 뜻으로 임진왜란 당시 한산해전이 끝난 후 온 바다와 갯가에 떠밀린 왜적들의 시체들, 그리고 살겠다고 아우성치며 도망치다가 도륙 당한 시체들을 한 곳에다 거두어 매장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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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목(蟻項, 의항)
한산해전에서 대패한 왜군들의 잔적들이 살길을 찾아 허둥대는 것을 우리 수군들이 이곳 한산만으로 유인하여 소탕하고자 하였다. 문어포에서 도망 갈 길이 트였다는 말에 속은 왜적들이 한산만 (제승당개)으로 몰려들었으나 길이 막혀 오도 가도 못한 왜적들이 이곳 산허리를 뚫고 도망가기 위해 개미 떼처럼 엉겨 붙었다. 그러나 뒤쫓아 온 아군과 앞서 상륙한 육전대에게 모조리 도륙 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왜적들이 개미 떼같이 엉겨 붙어 개미허리 모양으로 잘록 이진 모가지같이 되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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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억개(頭億浦)
제승당에서 남쪽으로 강줄기처럼 긴 포구로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한산해전 때 이곳으로 쫓겨 온 왜적들이 물길이 막히자 미처 뱃머리를 돌리지 못하고 거의 전멸되었다. 소탕전에 나선 우리 군사들 칼에 머리가 억수로 떨어졌다 하여 붙인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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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포(問語浦)
한산해전에서 대패한 후 한산만 좁은 물길로 쫓겨 온 왜군 패잔병들이 문어포 개 안에서 신선같은 노인에게 도망갈 길을 물었다. 이곳 지형이 뱃길로 한산만 좁은 개 안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인 개 목으로 깊숙이 들어간 좁은 물길이 있어 계속 넓은 바다로 뚫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왜적들이 이리로 가면 넓은 바다로 빠져나갈 수 있느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거짓 대답을 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연혁
한산면은 본도와 주변에 산재한 도서들로 이루어진 지역으로 총 65개의 유·무인도를 포함하고, 청사에 길이 빛날 한산 대첩지로서 이름 높은 국난극복의 역사적인 고장이며,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한려해상국립공원이 시작되는 지역으로, 남쪽으로 힘차게 뻗어내린 태백산맥의 산줄기들이 바다에 잠겼다가 크고 작은 멧부리들이 바다 위에 봉긋 솟아올라 아름다운 다도해를 이룬 섬들의 한 부분이다.
땅은 순하나 그 굴곡은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아 높고 낮은 봉우리들이 키를 재고 그 기슭과 골짜기마다 인가들이 자리 잡았으며, 해안은 드나듦이 매우 복잡하고 거울 면과 같은 잔잔한 바다를 끼고 있으며, 바깥 바다로 나갈수록 낭떠러지가 심하여 절경을 이루었다. 올마올망 흩어진 섬과 섬 사이 우뚝우뚝 바닷가에 병풍처럼 둘러선 산들, 그 산과 언덕들이 아늑하게 품어 안은 호수 같은 맑고 푸른 바다 위에 크고 작은 배들이 한가롭게 떠다니며, 동백나무를 비롯한 울창한 숲과 물감을 짓이겨 푼 듯한 비췻빛 바다와 산, 하늘이 어우러져 빚어놓은 풍경은 장관을 이룬다.
이 아름다운 고장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역사적 기록은 없으나, 약 450여 년 전으로 추정되며 기후는 여름에 시원한고 겨울에는 춥지 않은 곳으로 겨울에도 기온이 영하 이하로 내려가는 날이 드물다.
한산면은 한산도(閑山島)의 지명을 따서 붙여진 행정구역의 면(面) 이름인데, 한산도란 지명 유래는 한(閑) 자를 막을 한(閑)으로 해석하여 임란 때 이충무공이 이곳에서 왜적을 막았다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한가할 한(閑)의 뜻으로 해석되어 통영 앞바다에 한가로이 떠 있는 섬이라 하여 한산이라고 불 이어진 설, 그리고 육지로부터 한산도로 들어오는 관문인 한산면 여차, 관암, 문어포 마을과 제승당의 지형이 한자의 한(閑) 자, 산(山) 자와 비슷하여 한산도라 불리었다는 구전이 있다.
행정구획상으로 한산면 지역은 원래 거제에 속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거제군 3현 가운데 하나인 명진현에 관할되었으며, 그 후 조선 초기까지는 거제현 남면, 그리고 후기에는 거제현 둔덕면 7방에 속했으며, 행정 동리는 14동이었다. 그 후 한말 광무 4년(1900) 고성군에서 분리 독립된 이 고장 통영군 한산면, 그리고 통영시 한산면이 되었다.
연혁
- 1858년 : 거제군 한산면 설치
- 1900년 : 진남군 한산면 개칭
- 1909년 : 용남군 한산면 개칭
- 1914년 : 통영군 한산면 개칭
- 1995년 : 통영시로 통합으로 통영시 한산면이 되었다.